본문 바로가기
책 추천

공정하다는 착각 :: 개요, 내용, 여담, 느낀점

by small think2 2023. 8. 6.
반응형

Image 0 Image 1 Image 2

 1. 개요

 이 글은 마이클 샌델의 책에 대한 내용입니다.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로 의역되며,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무엇이 공공선인가?)"입니다. 이 책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Image 0 Image 1 Image 2

 2. 내용

 2.1. 대중이 포퓰리즘을 선택하는 이유

 주류 정당과 집권 엘리트들은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을 불러온 포퓰리즘 열풍이 저소득층의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세계화 - 기술 변화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는 얼마간의 진실을 담고 있긴 하지만 포퓰리즘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진단이라고 샌델은 말합니다. 포퓰리즘은 단순히 경제적 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문화적 불만이기도 합니다. 즉,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류 정당들의 어떤 실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포퓰리즘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2가지 요인입니다. 하나는 공공선(public good)을 기술관료적(technocracy; 테크노크라시)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술관료적 정치는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기준으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웃소싱, 자유무역협정, 무제한적 자본 유동성 등에 관한 비판은 '꽉 막힌 생각'일 뿐이며, 세계화 시대에 종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각하게 심화시켰습니다. 또한 기술관료적 통치 방식은 공적 담론을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그 담론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시민들은 점점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포퓰리즘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수십 년간 형성되어온 '승자와 패자에 대한 관점'의 변화입니다. 왜 중산층과 저소득자들이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깔보고 있다고 느끼는지 알아야 합니다.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이 엘리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계기는 빈부격차에 있습니다.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은 하위 50퍼센트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등의 폭발적 증가만으로는 포퓰리즘의 분노, 그 핵심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불평등을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즉,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상승(계층 이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되며 반대로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부유한 성인이 됩니다. 소득 기준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그 중 단 5%만이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2/3은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이며, 하위 5분위 출신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이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사회 계층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즉, 능력주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또한 현실을 떠나 능력주의가 완벽히 작동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덕적 문제가 생깁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그 시장이 인정하는 재능에만 어마어마한 보상을 줍니다. 즉, 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과 비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 간의 보상격차는 도덕적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어느 재능이 뛰어난가는 도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재능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똑같이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결국 시장이 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태도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재능의 보상은 시장에서 정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패자 또한 자신의 패배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면 된다'라는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를 오만으로, 패자를 굴욕과 분노로 몰아갑니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이 됩니다.

 2.2. 능력주의와 테크노크라시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부터 미국 초기 공화정까지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능력뿐만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공공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정치에 시민적 미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리며, 정부 영역에서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습니다. 학력이 있는 사람들의 명예는 보상받는 돈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대신에, 대부분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명예는 반대로 추락하게 되었고 이윽고 저소득층과 중산층 노동자들의 사회적 기여가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내던져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치경제적 관점 이전에, 기술관료적 정치인들이 말하는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는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일방적인 펙트(사실) 제시는, 시민들의 관점과 가치판단을 미리 정해버리는 기만에 해당합니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 됩니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습니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팩트'만 말하는 기술관료적 입장은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매력이자 단점이 됩니다. 기술관료들이 말하는 '스마트 기술'과 '스마트한 규제 틀' 같은 이야기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질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화석연료 산업의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민주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을 도구화하도록 부추긴 소비주의적 생활 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부른 그런 태도를 재고해야 할 것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며, '과학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특히 경제를 대규모로 뜯어고치며 특정인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는 게 아닌지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들이 할 수 있는,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기술관료적 정치의 가치중립적 태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예 언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 가치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이 질문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가치들을 함께 논의하고 합의해나가며, 그래서 그 가치 판단으로 시민들이 그 사회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만들어줘야 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될 점은, 기술관료를 덜 뽑거나 뽑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기술관료의 말을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술관료가 사실로써 정치적 담론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이다. 즉 관료는 사실과 함께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담론도 형성되도록 해줘야 하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토론할 가치도 없다고 막아버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과학적 사실이 사회나 정치에 받아들여질 때는, 그 사실이 학자들의 담론을 통해 검증된 것으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또는 '시민들 각자는 이 사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담론과 정치적 검증을 한 번 더 거쳐야 됩니다. 그것이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2.3. 승자와 패자 나누기

 2.3.1. 능력주의 교육의 문제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기반한 교육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결국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원인이 됩니다. 상위계층은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며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하위계층은 교육과 기회 부족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회적인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이동성을 막아버립니다. 따라서 능력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포퓰리즘 현상은 단순히 경제적 불만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도덕적, 문화적 불만도 포퓰리즘 선택의 동력이 됩니다. 능력주의와 기술관료주의가 주류 정당들의 실책으로 인해 포퓰리즘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시민들의 참여와 공론의 장을 만들어 주어 사회적 가치와 도덕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 분야에서도 능력주의적 교육을 개선하여 사회적인 불평등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포퓰리즘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2. "인재 선별기"가 된 대학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뭘까요?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것은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능력주의가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을 맡되, '나는 나의 능력만으로 성공했으니 이 정도 명예와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는 시각 자체를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샌델은 주장합니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 부분에서 능력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스스로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성공관이 되어 버렸는지 알아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명문대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보고, 그 목표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을 배경 불문 모집하고 훈련시켜 사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1940년대 하버드대 총장인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서 나왔습니다.

 코넌트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세습 상류층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런 엘리트층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반한다고 믿었으며, 이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 지성과 과학에서 앞서갈 필요가 있던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기존의 비민주적인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인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리트가 배경을 불문하고 충원되고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능력주의 쿠테타를 이루기 위해 코넌트는 교과 내신성적은 보지 않고, 오직 지적 능력만을 근거로 주어지는 장학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가 장학생을 뽑기 위해 마련한 테스트는 미육군의 IQ테스트와 비슷했는데, 이후 SAT(수학능력 평가시험)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SAT는 전국 대학의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SAT는 배경과 무관한 시험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갑니다. 또한 SAT는 코넌트의 희망처럼 사회 이동성과 그에 따른 무계급 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바뀔 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입장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가난한 집 자식들만이 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능력주의 고등교육은 사회 이동성의 엔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고등교육을 기본적인 기회의 엔진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슬픈 소식일 것입니다.

 샌델은 여기서 '대학 학위가 없으면서 명예로운 직업과 고상한 삶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동료 시민 다수는 높은 학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더 높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끊임없이 닦달하는 것은, 그들을 고무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샌델 교수는 제안을 하나 합니다. 바로 추첨제를 통한 대학 입시입니다. 수많은 대학 입학 지원자들 중에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거나, 동료와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제외한 뒤, 남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학에 최종적으로 입학하게 되는 학생들도 본인의 능력이 아닌 운에 따라 입학한 것이 되므로 오만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부와 학력의 세습을 피하기 위해 부모가 고졸인 학생들을 우선 선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2. 완벽주의라는 상처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킵니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 자녀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뽑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깁니다. 별 문제나 말썽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세습적 엘리트와 달리,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주고, 학생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습니다.

 결국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줍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성취를 얻기 위해서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과도한 압박을 합니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의 시작인 것이죠.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습니다.

 "6~8세의 경우 1981년에 비해 1997년에는 노는 시간이 25%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숙제는 2배로 늘었습니다." 이는 능력주의로 인해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 데 따른 대응이었습니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지만,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메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 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새롭게 나타난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임을 레빈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동연령대 중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을 경험합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문제를 가진 아동들은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동연령의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고 합니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입니다.

 샌델은 그 사실을 자신의 학생들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고민하면서 대학 생활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와 싸우고 싸우는 일을 거듭해왔고, 심지어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일자리를 얻게 된 이후에도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놀랄 만큼의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의 대학생들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입니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습니다.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적이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에 달했습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입니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합니다."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능력주의 병폐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오늘날,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때가 왔습니다.

능력주의적 사명은 인간의 운명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도덕법입니다. 성공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성공자는 자신이 뛰어난 능력으로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잘못을 탓하며, 자책과 굴욕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명은 두 가지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첫째,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과 자만심이 심해지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성과를 자신의 우월함과 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적의 희생양으로 보기 쉬워집니다.

둘째, 실패한 사람들은 과도한 자책과 자기비하에 시달리게 됩니다. 능력주의적 사명은 사회적으로 불공평한 상황에서도 개인의 능력만이 성공과 실패의 결정 요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절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 책임에 대한 강조는 사회적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 시대의 불평등과 사회적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주의적 사명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을 간과하고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중요시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연대와 공정한 사회 구조를 고려하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기회의 불균형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능력주의에 빠지지 않고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2.3.2. 생산자로서 일의 존엄성 회복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만을 일방적으로 칭송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저학력자들은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은 비대졸 노동자들에게 굴욕감과 무력감을 선사하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닫게 합니다.

 특히 저학력 중년 백인 노동계급을 예로 들면, 절망 끝의 죽음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는 빈곤에 따른 불행이 아니라, 학력이 모자란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특별히 고통스럽게 겪는, 명예와 보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능력주의 시대에서 사회적 연대의 끈이 풀어지고 분노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이러한 능력주의 사회가 끊어버린 사회적 연대를 다시 매우고, 서로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존중하며 공적 문제에 대해 협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4. 대안: 조건의 평등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으로는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 즉, 공산주의가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습니다. 바로 "조건의 평등"입니다. 이는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각각의 직업에 사회적 존경이 부여되며, 직업의 의미와 역량을 계발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정보를 보급하며 공유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조건의 평등은 사회적 이동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있는 것에서 나옵니다.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부딪힐 수 있는 공공의 장소와 공립 학교, 대중 교통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힘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조건의 평등은 민주주의적인 평등의 눈을 통해 사회적인 이동성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통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공동의 공간에서 만나 토론하며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합리적인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일은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 되어야 하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를 주고, 동료 시민으로부터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건의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부딪히고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는 능력주의적 사회가 끊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는 길이며, 민주주의적인 평등과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Image 0 Image 1 Image 2

 3. 여담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학력자와 고소득층은 다른 사람들을 '똑똑한데 재수없는 놈'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하며, 저학력자와 저소득층은 자신의 학력이나 소득이 낮은 것을 자학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든지 그들의 직업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2) 이러한 태도의 문제는 이미 정치적인 권력을 바꾸는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학습하며, 함께 토론해봐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의 국내 출간을 앞두고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방역 실패를 비롯한 여러 실정에도 이번 대선에서 7천만 표 이상을 획득한 것은 양극화 심화 등 미국식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증거라고 지적하며, "트럼프의 거취는 불분명하지만 엘리트에 대한 분노, 양극화 문제는 계속 남아있다"고 언급하며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 말고도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시민들이 존경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저자는 해결책으로서 학업과 직업 선택에 '운(luck)'적 요소를 도입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운(luck)에 의존해서 뽑아내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라면 1등부터 꼴등까지 정하는 방식의 무한경쟁이 아닌, 해당 수업이나 업무를 이해하거나 수행할 수 있는 '최저 요구조건을 충족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추첨'하는 시스템을 적용해보자는 것입니다. 즉, 능력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유능력자 제비뽑기"(최소자격제 내 추첨)를 통해 조금 더 공평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철학서로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는 그 목적이 없습니다. 고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철학서들도 사람들의 근본적인 생각을 뒤집거나 바꾸려고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에 대해서만 "구체적인 대안이 없으므로 무의미하다"고 비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각자의 상황에 맞게 구체적이고 적절한 대안을 찾을 것입니다. 환경 문제, 인종 문제 등의 시대적인 담론들도 처음부터 구체적인 대안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점차 바뀌자, 거기에 맞춰 그 생각을 실제로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뒤따라 섰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현재는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오히려 더 핵심을 건드리는 작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자가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이 자신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을 설명한 TED 영상도 있습니다. 2022학년도 수능 대비 수특에서도 이 책의 홍보 페이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공정하다는 착각》을 요약한 만화도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Image 0 Image 1 Image 2

 느낀 점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어서 매우 의미있었습니다.

 우선, 저자가 제기한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개념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고학력자나 고소득층이 자신의 성과를 어느 정도는 개인의 자질과 노력으로 인정하지만, 우연한 운명적 요소들(운)에 대해 무시하거나 그들의 성과를 운에 기인한 것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상대적으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학 학위나 높은 직업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회적 직업들이 가진 가치와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가려지고 소외되는 문제도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학업 성취나 소득에만 기반하지 않고, 사회 공공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노력과 가치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책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는 초점을 두지 않았지만, 우리가 공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고,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며 논의하면서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제공하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고,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Image 0 Image 1 Image 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