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서입니다. 1914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18년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으며, 1921년 독일에서 『자연철학 연보』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러셀의 서론과 함께 처음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이후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보완된 영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논고』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발전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기간 동안 저자에 의해 쓰여졌으며, 최종 원고는 192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는 미완성된 형태로 독일의 『자연철학 연보』에 러셀의 서론과 함께 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1922년에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보완된 영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2. 구성
『논리-철학 논고』는 러셀의 서론, 모토, 머리말과 본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본문은 제1번부터 제7번까지의 명제들과 각각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부연 설명들을 포함한 전체 선언[개별] 명제는 모두 525개입니다.
『논고』의 구조에서 주제들에 따른 분류는 대표적으로 글록과 랑게의 분류가 있습니다. 아래는 해당 분류에 따른 구성을 정리한 것입니다:
글록의 분류
1~2.063: 존재론
2.1~3.5: 그림이론
4~4.2: 철학론
4.21 5.641, 6.1 6.13: 논리론
6.3~6.372: 과학론
6.373.~6.522: 신비주의
6.53~7: 철학 방법론과 「논고」의 지위
랑게의 분류
1~2.063: 존재론
2.1~3: 사실의 그림들
3~3.41: 사고
3.41~4.0031: 사고로부터 언어로
4~4.06: 그림으로서의 명제
4.22~4.28: 요소 명제와 고유명사
4.3~4.44: 진리 조건들의 표현으로서의 명제
4.44~4.53: 일반적 명제 형식
5.1, 5.14~5.24: 확률; 연산
5.24~5.41: 연산과 진리 연산
5.4~5.47: 몇몇 논리적 상수들로서의 일반적 명제 형식
5.47~5.55: 연산 N, 일반성, 동일성, 외연성, 그리고 요소 명제들의 형식
5.55~6: 언어의 한계와 유아주의
6~6.21: 논리학과 수학
6.21~6.32: 방정식들, 과학 법칙의 형식들, 과학적 방법의 근본 원칙들
6.32~6.4: 법칙들과 과학적 세계 기술의 그물
6.4~6.5: 윤리학과 미학
6.5~7: 철학과 철학의 형식
이렇게 『논고』는 러셀의 서론과 함께 글록과 랑게의 분류를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제에 대한 명제와 부연 설명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 해설
3.1. 그림 이론
그림 이론은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진리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이를 모사설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말로 세계를 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서 『논고』에서는 2.1~2.225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명백히 그림 이론을 인식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대응론 또는 모사설을 비판합니다: "명제의 부정(올바르지 못함)은 진술과 사태의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사태의 부정(진정하지 못함)은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본질의 불일치를 뜻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정은 '꼭 들어맞지 않음'으로 개념 파악됩니다. '꼭 들어맞지 않음'은 진리의 본질로부터 밖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의 진술과 하나의 사태의 합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술이 올바름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태도의 열린 자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드러나 있는 것'은 표현적 동화를 위한 기준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 자세의 태도는 이러한 척도에 스스로를 맞추어야 합니다. 즉 열린 자세의 태도는 모든 표현 활동을 위한 기준 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이러한 역할이 태도의 열린 자세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지 태도의 이러한 열린 자세를 통해서만 진술의 올바름(진리)이 가능하다면, 올바름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더 근원적으로 적법하게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진리를 그것의 유일한 본질 장소로 간주되던 진술에만 할당하던 재래의 배타적인 관례는 붕괴합니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명제 안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준 척도를 앞서 내어주는 열린 자세의 태도의 내적 가능성의 근거에 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단지 이러한 가능성으로 인해, 명제의 올바름은 여하튼 진리의 본질을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외모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진술의 올바름으로서 이해된 진리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방식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구문론적 형식을 물상화(명사화)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틀렸습니다. 카르납 자신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런 물상화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언설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고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카르납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존재'를 명사(사고 대상=명제 변수)로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카르납에 따르면, '존재'를 사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합니다. '존재'라는 자연 언어의 기능(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은 논리적으로 구문론적 형식, 기호로서는 존재 양화사 ∃로 번역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문장을 뒷받침하는 형식이지 문장의 내용이 되지 않습니다.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 언어문("존재란 P다")에 대응하는 명제 함수 P(∃)는 +나 -를 변수에 대입한 수식같이(예를 들어, 2++=5라고 하는 것처럼) 완전히 부조리한 것입니다. 하이데거와 카르납, 즉 존재론과 논리 실증주의는 여기에서 '존재'의 이해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직후 그런 기도가 '전부 아프리오리하게 그저 무의미'한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 심정에 공감을 표명했다고 전해집니다."
3.2. 유아론적 경향
유아론적 경향이란 보통 철학계에서 조지 버클리의 극단적 경험주의를 일컫는 말로 정의되는 것입니다. 버클리는 세상과 정신의 구분을 주장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각자의 관념과 감각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컴퓨터 속에는 다양한 부품들이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컴퓨터의 다른 부품들을 지각하지 않고는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나무나 의자와 같은 물체들도 지각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감으면 그 물체들은 무로 돌아가며, 다시 눈을 뜨면 그들은 다시 창조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아론은 종종 오해를 받는데, 유아론이 말하는 것은 개개인의 주관적 정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하려고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아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유아론이 말하려는 바가 전적으로 옳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낼 뿐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세계와 삶은 하나이며, 나는 나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후기에 이르러 장년이 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통렬하게 반박되는데요."
이렇게 유아론과 관련한 여러 견해가 『논고』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3. 논리학에 대한 견해
루돌프 카르납은 논리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논고(Tractatus)"에 담았습니다. 그는 철학 자체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 빈번히 일어나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논리적 구문론을 충실히 반영한 기호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카르납은 프레게와 러셀의 개념기호법을 예로 들었는데, 이들의 기호언어는 결함을 배제하고 있지만,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논고"에서 기본적으로 기호논리학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용되는 기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p, q, r: 명제(특히 요소 명제)를 나타내는 기호들.
- p ∨ q: "p이거나 q이다."라는 명제를 나타냅니다.
- p ∧ q: "p이고 q이다."라는 명제를 나타냅니다.
- p ⊃ q: "p이면 q이다."라는 명제를 나타냅니다.
- p ≡ q: "p이면 q이고, q이면 p이다."라는 명제를 나타냅니다.
- ∼p: "p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나타냅니다.
"├" 기호는 프레게의 판단(또는 주장) 기호입니다. "├ p"는 "나는 p가 참이라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진리표를 사용하여 명제들의 진리 값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p ∧ ∼q) ∨ (q ∧ ∼p)의 진리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p | q | (p ∧ ∼q) ∨ (q ∧ ∼p) |
---|---|---|
T | T | F |
T | F | T |
F | T | T |
F | F | F |
이렇게 논리학은 명제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카르납의 논고는 논리학의 기초를 닦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철학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4. 수학에 대한 견해
19세기 말 유럽 수학계에서 집합론은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집합론이 과연 수학의 토대로 적절한가?'라는 의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논고(Tractatus)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집합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논고"에서 집합론이 수학에서 전혀 쓸모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집합론을 옹호한 러셀과 대비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수학 교과서들을 보면 집합론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수학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수학적 추론과 증명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러셀의 주장은 당시의 수학적 사고 방식과 철학적 견해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학과 논리학의 발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되며, 새로운 발견과 아이디어가 수학의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수학 교과서는 여전히 집합론과 같은 기초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으며, 집합론은 수학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견해의 충돌은 수학과 논리학의 복잡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며, 현대의 수학은 집합론을 포함하여 여러 학문 분야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3.5. 역설
「논고(Tractatus)」를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이러한 모순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인 줄리언 벨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아이러니한 태도를 풍자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그는 "넌센스한 말을 하고, 수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침묵하라는 자신의 맹세를 깬다. 윤리학, 미학에 대해 밤이나 낮이나 얘기하고, 이것저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고 합니다. … 어떤 문제에 관해서건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요? 루트비히가 법칙을 세우는 일을 피했던 것을. 사람들과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소리쳐 막고, 우리 말을 멈추게 합니다. 그 자신은 더듬거리면서. 논쟁은 끝이 없다. 몰아붙이듯이, 열이 나서, 큰 소리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6.54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 - 그 위에 서서 - 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습니다. 당시 줄리언 벨이 시를 지었을 때는 이미 후기 철학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적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도 이에 대해 경멸적으로 "줄리언 벨들"(독창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혐오감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고 6.54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으며 분란을 만들어 왔습니다. 로저 화이트는 논고 6.54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의 노선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 귀류 논증 해석: 논고의 결론이 논고의 주장을 부정하므로 논고 자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바 없는 소극적인 비판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논고가 논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고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어떠한 피상적인 반론도 무시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 상위 언어로 올라가는 해석: 러셀의 해석이며,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언어로 향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즉, 기존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다른 명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에 관하여 명료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지 요점을 놓친 채 얼버무려 넘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주장되는 것은 두 번째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될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해석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이야기와 오해뿐"이라며 비난했습니다.
- 논고 6.54를 무시하는 해석: 램지의 해석이며, 6.54를 수사학적 장식 문장으로 간주하고 논고에서 의도적으로 추방시키는 해석입니다. 명제 6에서 멈추는 1916년 판 논고를 진본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6.5 이하의 문단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전체에 걸쳐 주장했던 핵심 입장의 마지막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 외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치료적 해석: 논고는 독자를 속여서 그 책의 내용이 마치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그러한 이론은 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독자가 심사숙고해온 명제들은 스스로를 헛소리라고 비난하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해서 독자는 그러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충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명제와 논리학의 본성을 명료하게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렬한 열정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또 치료되었으면 당연히 내버려야 했을 그런 종류의 탐구를 1929년에 철학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 치료 활동이 매우 하찮은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습니다.
- 전통적 해석: 귀류 논증 해석과 달리 헛소리 문장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과 '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가'를 둘 다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의 난점은 추가되는 사실을 만들지 않으면서, 보여지기만 하는 사실들 속의 유형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해석은 러셀이 썼던 것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도 있습니다.



4. 기타
「논고」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출판사가 출판하기를 꺼렸지만,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의 명성 덕분에 그의 서문으로 가까스로 출판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서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그는 러셀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출판을 진지하게 보류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비로 출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셀은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 사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나의 해설을 싫어했다는 것, 출판업자들이 나의 해설이 들어가야만 「논고」를 출판하겠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이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서문을 「논고」에서 뺄 작정이었지만, 알프레드 에이어가 서문이 「논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늘 불평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그의 말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 그대로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자 본인이 서문에 불만을 표시했는데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점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보이는 본서의 서술 방식에 대해 일본의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준엄하기 짝이 없다"며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약자는 '논고'이나, 커뮤니티 등에서는 '논철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영어 약자는 영역본 서명의 두문자어인 'TLP'입니다.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느낀점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과 논리에 대한 그의 개념을 탐구한 유명한 저작물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먼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사고의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놀랍게 느꼈습니다. 그의 접근은 현상학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독특하며, 때로는 난해해 보이는 구문과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언어의 한계와 의미에 대한 미묘한 차이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의 주장들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수학과 집합론에 대한 관점에서도 독특한 입장을 취했으며, '집합론은 전혀 쓸데없다'라는 말은 극적이지만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이었습니다.
특히 「논고」에서 논리와 언어의 복잡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사고 방식은 '규칙의 무한 회귀'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는 논리적인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도 이를 해명하는 데에도 한계를 인정하며,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러니한 태도에 대해 많은 고찰이 있었습니다. 그는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를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와 관련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는 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해 깊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총괄적으로 보면,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많은 도전과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의 철학은 현대 철학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논리적 사고와 언어의 복잡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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